극우 인플레이션

극우 인플레이션
대구 장외투쟁에서 연설하는 국민의힘 장대표

최근 언론의 보도를 보면, 대한민국은 온통 ‘극우’로 둘러싸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자신과 반대의 조금만 우파적 성향을 띄어도 ‘극우’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쯤 되면 ‘극우’가 아닌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다.

파리를 방문한 대표적인 극우 성향의 아돌프 히틀러

본래 ‘극우’라는 단어는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파시즘, 나치즘과 같이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인종적·민족적 우월성에 기반한 폭력과 배제를 옹호하는 극단적인 정치 이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합법적 국방력 강화나,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건전한 재정 정책은 결코 극우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일부 언론은 이 ‘극우’라는 단어를 너무나 손쉽게 사용한다.

자신들의 정치적·이념적 스펙트럼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를 손쉽게 악마화하고, 논쟁의 장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프레임 전략’으로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우’ 딱지 붙이기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 언어의 가치를 떨어뜨려 진짜 위험을 흐린다. 모든 것을 ‘극우’라 칭하는 것은 마치 모든 병에 ‘암’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과 같다. 단어의 인플레이션은 그 본래의 심각성과 경고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정작 사회가 경계하고 맞서 싸워야 할 진짜 극단주의, 즉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혐오와 폭력 선동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이를 제대로 분별하고 대응할 힘을 잃게 된다. ‘양치기 소년’의 외침처럼, 정작 늑대가 나타났을 때 아무도 그 경고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둘째, 건전한 정책 토론의 실종을 야기한다. 정치적 견해 차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복지 확대와 재정 건전성, 국가 개입과 시장 자율, 안보와 평화 등 다양한 가치는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나가야 한다. 그러나 상대를 ‘극우’로 규정하는 순간, 정책의 타당성을 따지는 이성적 토론은 사라지고 ‘절대악’을 향한 도덕적 비난만 남게 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를 극단으로 몰고 가며, 타협과 협의의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셋째, 언론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는 행위이다. 언론의 사명은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고, 공정한 논평을 통해 여론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 진영의 입장에서 반대편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편향된 용어를 남발하는 것은 언론의 공정성과 신뢰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독자와 시청자들은 이러한 의도적 ‘딱지 붙이기’에 피로감을 느끼고, 결국 언론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물론 우리 사회에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언론은 더욱 신중하고 엄격한 잣대로 ‘극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보수와 우파, 그리고 극우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단순히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정치적으로 불편하다는 이유로 ‘극우’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는 관행은 이제 멈춰야 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활발한 토론과 비판 위에서 꽃핀다. ‘극우’라는 손쉬운 낙인 대신, 상대방의 논리를 경청하고 합리적인 근거로 반박하는 성숙한 공론장이 절실한 때다. 언론은 이러한 공론장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다.

더 이상 스스로의 권위와 언어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